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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정의 자유 추구한 '작업의 달인'들
문화 / 세계의 카사노바들
카사노바, 돈 후안, 바이런, 카이사르, 허균

최근 개봉했던 영화 ‘카사노바’는 자신의 이름이 곧 바람둥이를 의미하게 된 남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바람둥이는 대단히 매혹적인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가 자신의 곁을 떠나갔을 때는 저주를 퍼부을지언정, 그와 함께 있는 순간만큼은 눈앞의 현실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역사상 유명했던 카사노바들의 면면과 그들의 애정행각을 살펴본다.

카사노바(Giacomo Girolamo Casanova·1725~1798)

고유명사여야 할 이름이 일반명사화되는 것만큼 이 세상에 자신의 족적을 뚜렷이 남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카사노바는 그런 견지에서 본다면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 만하다. 그가 바람둥이의 대명사로 각인된 것은 말년에 집필한 그의 자서전 때문이다. 12권으로 쓰여진 그의 자서전 ‘회상록(Histoire de ma vie)’에는 122명의 여성과 나눈 사랑 이야기가 상세히 적혀 있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카사노바’는 카사노바가 사랑했던 한 여인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희대의 바람둥이였던 그가 사실은 한 여자만을 사랑했음을 내비친다. 하지만 그 스스로 자서전의 서두에서 “나는 여인을 사랑했다. 하지만 내가 진정 사랑한 것은 자유였다”라고 적었듯이, 실제로 그는 한 여자에 예속되지 않고 전 유럽을 떠돌며 끊임없이 새로운 목표물을 찾아다녔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태어난 카사노바는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그의 직업은 성직자, 작가, 외교관 스파이, 도박꾼, 바이올린 연주가 등 가지각색이었고, 교제 범위는 프랑스의 루이 15세,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 등과 같은 왕족에서부터 볼테르, 루소 등과 같은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는 당시 계몽주의 사상을 전파하던 비밀결사조직 ‘프리메이슨’의 일원이기도 했다. 호머의 일리아드를 이탈리아어로 번역했고, 저서만 40권에 달한다.

그의 여성편력은 17살이던 때 한 자매와 동시에 관계를 맺으면서 시작된다. 이후 그는 신분 고하에 상관없이 각계 각층의 여성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 이 중에는 수녀도 있었고 모녀도 있었다. 몇 차례 결혼의 문턱까지 갔으나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는 친딸과 관계를 가져 그 딸이 아이를 낳음으로써 그 아이의 아버지이자 외할아버지가 된 엽기적인 일화로도 유명하다. 이에 대해 그는 “아버지가 되어서 딸과 한번 자보지도 않고 어찌 그 딸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신의 친딸마저 욕정의 대상으로 삼았던 그였지만 여타 유럽의 귀족이나 예술가와 달리 동성애와는 명백한 담을 쌓고 지냈다.

2m의 장신이었던 그는 누구나 호감을 가질 만한 외모를 지녔고 최신 유행과 패션에 민감했다. 전공을 가리지 않는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화술에도 능했다. ‘유혹의 기술’의 저자 로버트 그린은 카사노바를 바람둥이형이 아닌 헌신적인 연인형으로 분류했다. 그린은 “어떤 경우든 카사노바는 그들의 이상형에 맞게 자신을 변모시켰다. 다시 말해 그는 그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일들을 현실로 만들어주었다”고 카사노바의 매력을 분석했다. 이 때문에 그와 사랑을 나눈 여인들은 그가 아무 말 없이 사라져버린 뒤에도 그를 원망하기보다 오랫동안 가슴에 품었다.

이런 카사노바의 매력도 세월 앞에선 퇴색하고 말았다. 38살 때 그는 영국 런던에서 한 젊은 창녀에게 속아 그녀의 몸에 손끝 하나 대지 못한 채 전 재산을 몽땅 털렸다. 이 일을 겪은 직후 그는 자살을 결심했다. 하지만 “작은 유흥을 한번만 더 즐기고 죽어라”라고 말한 한 친구의 권유에 따라 당분간 죽음 대신 쾌락을 이어갔다.

그는 성적인 매력이 다한 노년에 이르러서는 변변한 직업도 없이 근근이 살아갔다. 결국 60세 때인 1785년 프라하의 한 백작이 그를 자신의 도서관 사서로 채용했다. 백작의 성에서 사서로 일하면서 자신의 생애를 글로 옮겨 적었다. 이 자서전은 그가 73세를 일기로 죽던 해인 1798년 그의 조카에게 건네져 후대에 카사노바란 이름을 알리게 된다.


돈 후안(Don Juan)

카사노바와 함께 또 다른 바람둥이의 대명사로 불리는 인물은 돈 후안(Don Juan)이다.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를 쓴 전기(傳記)작가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는 “카사노바와 돈 후안은 호색한이라는 동일한 옷을 입고 있긴 하지만, 서로 다른 두 유형을 대표해 왔고 대립하는 면도 많다”고 말했다.

카사노바가 실존 인물인 것과 달리 돈 후안은 전설 속의 인물이다. 스페인 태생인 이 전설상의 인물은 귀족 가문 출신으로서 여성을 통해 쾌락을 추구하는 대신 정복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악마적인 캐릭터를 가졌다. 그는 카사노바처럼 여성이 바라는 대로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는 여자들이 얼마나 쉽게 유혹에 빠지는지를 증명하기 위해 매번 새로운 대상을 찾아 나섰다. 이 때문에 그와 하룻밤을 보낸 여성은 다음날 아침 자신을 기만한 유혹자에 대해 증오감에 휩싸였다. 이야기 속에서 그가 관계를 맺은 여성은 1000명을 헤아린다. 그는 자신의 하인을 시켜 자신이 잠자리를 한 여성들을 명부에 기록하도록 했다. 전설에 따르면 돈 후안은 귀족 가문의 한 젊은 여성을 유혹한 후 다툼 끝에 그녀의 아버지를 살해한다. 훗날 그녀 아버지의 유령이 그에게 악수를 청한 뒤 그를 지옥으로 끌고 간다. 그는 다양한 예술작품의 소재로 등장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모차르트의 ‘돈 지오반니(Don Giovanni)’, 푸시킨의 희곡 ‘스톤 게스트(Stone Guest)’ 등이 있다.

▲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
바이런(George Gordon Byron·1788~1824)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바람둥이다. 그는 선천적인 장애로 인해 오른발을 절었다. 하지만 수려한 외모와 외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귀족 작위(Lord), 호화로운 생활, 케임브리지대학 출신 학벌 등으로 인해 문단에 등단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뭇 여성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요즘 스타들이 관용어처럼 사용하는 “자고 일어나보니 유명해졌다”라는 말을 처음 한 이가 바이런이다.

그는 선천적인 절름발이였음에도 만능스포츠맨이었다. 승마, 크리켓 실력이 뛰어났고, 수영으로 다르다넬스(Dardanelles) 해협을 건너기도 했다. 그는 낭만주의 시대의 연예인이었다. 외모를 가꾸는 데도 지대한 관심을 가져 살을 빼기 위해 일부러 먹은 음식을 토해내는 등 한때 거식증 증세를 보이기까지 했다.

그의 여성 편력은 카사노바와 마찬가지로 전 유럽에 걸쳐 있다. 스코틀랜드에서 자라났지만 성년이 되어 유럽과 아시아 등지를 순회한 바이런은 베네치아에서만 1년 동안 200여명의 여성과 관계를 가졌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그가 35년 남짓한 인생 동안 관계를 맺은 여성의 수는 3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의 이복누이와 관계를 맺기도 했다. 그는 “여성과는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사실상 연인으로 지내는 것이고, 그 관계가 끝나면 아무 사이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애정행각은 여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만난 합창단에서 활동하던 15세 소년 존과 동성친구 이상의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그의 화려한 연애사는 시를 짓는 데 있어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실제로 ‘The Cornelian’ ‘To Thyrza’ 같은 시는 그와 사랑을 나눈 이들을 모델로 한 작품들이다.

바람둥이였던 그는 전설적인 호색가 ‘돈 후안’을 소재로 서사시를 써나갔다. 미완성으로 남은 그의 유작 ‘돈 후안’은 주인공 돈 후안을 적극적인 바람둥이로 묘사하기보다 여성들로부터의 구애를 뿌리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수동적인 인물로 묘사한 점이 특징이다. 그는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여했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36세를 일기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 로마의 정치가 카이사르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BC 100~BC 44)

“수도의 시민들이여, 마누라를 지키시오. 우리가 대머리 난봉꾼을 데리고 돌아왔소.” 이는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원정을 마치고 금의환향하던 개선식에서 병사들이 장난스레 부른 노래의 한 구절이다.

실제로 카이사르는 수많은 명문가의 부녀자들과 놀아났다. 그와 함께 삼두정치(三頭政治)를 했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아내까지 그의 ‘작업 리스트’에 올랐다. “원로원 의원의 3분의 1이 카이사르에게 아내를 도둑맞았다”고 말하는 역사가가 있을 정도다. 특히 주위의 재혼 요청을 거절하면서까지 카이사르와 오랫동안 깊은 내연의 관계를 유지했던 세르빌리아와의 로맨스는 유명하다. 그녀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통해 유명해진 대사, “브루투스, 너도냐”에 등장하는 그의 암살 주모자였던 브루투스의 어머니다. 그가 통치한 속주(屬州)의 귀부인들 또한 그의 작업 리스트에서 빠지지 않았다.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의 염문은 그가 벌인 연애행각 중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정도다.

카이사르는 결코 미남이 아니었다. 젊어서부터 뺨에 주름이 깊게 패었고, 일찍부터 머리가 벗어지기 시작했다. 40대 이전엔 눈길을 끌 만한 권력가도 아니었고 재정 면에선 항상 빚더미에 올라 있었다. 그가 에스파냐로 원정을 떠나려고 했을 땐 빚쟁이들이 그의 집 앞에 몰려와 그를 막아섰을 정도다. 결국 그의 최대 채무자였던 크라수스가 다른 빚쟁이들에게 빚보증을 서 준 후에야 원정에 나설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화술은 원로원 전체가 당해내지 못할 정도로 능수능란했다. 마른 체격에 큰 키로 풍채도 괜찮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여성을 존중했다. 이 때문에 그와 헤어진 연인 중엔 그에게 원한을 품은 이가 없었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여자는 무시당했을 때 가장 깊은 상처를 입는 법”이라고 말했다. 나나미는 카이사르의 뒤탈 없는 작업 비결을 화려한 선물로 공략하고, 애인의 존재를 숨기지 않았으며, 관계한 어느 여자와도 결정적으로 인연을 끊지 않은 것으로 요약했다. 실제로 그는 클레오파트라와 교제할 때도 옛 애인인 세르빌리아를 위해 정치적으로 힘을 써주는 등 지나간 연인을 끊임없이 관리해 나갔다.

허균(許筠·1569~1618)

국내에서는 조선시대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이 당대의 카사노바로 알려졌다. 스물여섯 살에 과거에 급제한 그는 급제 후 3년 만인 1597년 처음 관직에 올랐다. 하지만 부임지에 서울 기생을 데려가 숨겨둔 사실이 적발돼 해직된다. 당시 사헌부는 고발장에 “황해도 도사 허균은 서울의 기생들을 데리고 가서 별장을 지어 앉히고 무뢰한들의 첩까지 출입시키고 있다”고 적었다. 이후 다시 관직에 오른 후에도 그는 기생들과 밤낮없이 어울렸고 이를 스스럼없이 기록했다.

당시 그를 비난하는 내용에는 여색(女色)과 관련된 내용이 빠지지 않는다. 실학자 안정복은 그를 두고 “어린아이처럼 경박하고 분별이 없어 음란하였고 욕망에 따라 음(陰)을 탐했다”고 말했다. ‘일사기문’이란 책에서는 그에 대해 “행실이 괴이해서 부모의 상을 입고도 기생과 놀아나고 참선과 예불에는 빠지지 아니한다”고 적었다. 실제로 그는 전라도 진안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를 치른 당일부터 기생을 끼고 놀았다. 심지어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 급박하게 사전작업을 벌이던 와중에도 전주에 있는 한 기생으로부터 “이 봄이 가기 전에 인생을 한탄하며 더불어 정을 나누어 보시지요”라는 내용의 편지가 날아들자, 지체없이 전주로 내려가 여색을 즐기는 과감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가 황해도 지방관으로 가 있을 때 사랑했던 기생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지었다는 다음과 같은 시(詩)는 당대에 어울리지 않는 그의 자유로운 연애관을 보여준다. ‘남녀의 정욕(情慾)은 인간의 본능이요, 예법(禮法)에 따르는 것은 성인의 가르침이라. 하늘이 성인보다 더 높으니 나는 본능을 따르지 감히 성인을 따르지 아니하리라.’

시의 대상은 자신의 친구인 이귀의 애인 계생. 허균은 전라도 부안으로 유배를 떠나 있는 동안 그녀와 가깝게 지냈다. 하지만 당대의 호색한으로 불렸던 그도 계생하고만큼은 육체적인 관계를 나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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